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인사동 사람들

한 때 인사동 사람들이라는 프리챌 까페를 운영했는데, 이 까페는 인사동 거리를 한 달에 한 번 이상 지나가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었고, 매주 토요일 까페 '인사동 사람들'에 모여 맥주 마시는 게 모임의 목적이었다. 이런 기이한 목적의 까페가 예상 밖으로 방송작가, 만화가, 애니메이터, 바이올린니스트, 백수, 직장인, 화가, 프로그래머 등등 매우 좋은 물(?)을 형성하였다. 이 때 조습도 참여하였는데, ... ... 하지만 이 까페는 건강 상의 문제가 운영이 매우 어려워져 버리고 말았다. 2-3달 정도는 매주 토요일마다 술을 마셨으나, 그 이후로는 다들 건강이 악화되어 중도 하차하였고 결국 까페는 없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런 까페를 다시 네이버에다 만들어볼까? 크크. 지..

일요일 오전

길을 가다 아무렇게나 산 천원, 이천 원짜리 화분들이 몇 해를 넘겨가며 무심한 사람 곁에서도 잘 견디고 있는 걸 보면 나도 그리 복 없는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안방 베란다 창 밖으로 빼곡히 들어차있는 빌라들 사이의 작은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의 바지 매무새를 고쳐주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자, 눈에 물기가 고이는 건 무슨 연유일까. 텅 빈 속에 와인 한 잔 마시고 feist와 Bell and Sebastian의 노래 소리에 맞추어 몸을 흔들자, 머리 안에서 텅 텅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숭고에 대하여

최후Ultime는 실패인 동시에 약속이고, 버려짐인 동시에 구원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들에겐 구제자이기도 하다. 숨을 거두며 최후의 말을 남기는 사람은 그 말과 함께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곳으로 간다. 그는 패배하되 남은 이들이 거둘 수 있는 하나의 말을 남겼으니, 죽음이여, 너의 승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최후의 말은 통과를 위한 암호이다. 또 숭고의 도식이다. 우리는 파스칼적인 의미의 불균형disproportion에 용감히 맞선다. 그러자 그 위압적인 것이 음악적으로 변모하면서 무릎을 꿇고 만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이 한 마디 말에 의해 상쇄되다니. 그 때 그 말은 하나의 작품이나 다름없다. 어떤 조건 하에서는 내일 없는 패배도 패배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위압"의 관계..

어느 토요일 아침

10시간 넘게 잠을 잤다. 그간 모자랐던 잠을 몰아 잤던가 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곱게 갈려 나온 원두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Earl Klugh의 'Life Stories'를 듣고 있다. 이 매력적인 기타리스트는 감미로운 멜로디로 사춘기적 애상(哀想)에 젖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날 어둡고 무거운 교복 밖으로 나온 그녀의 찬란한 꿈결을 보며 매혹당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27일 새벽 2시

1. 우울한 천사가 내 머리 위에 앉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이야, 이제 그만 내려오렴. 어둠은 이제 우리 목 밑까지 차올랐단다. 앞을 보지 못하는 우울한 천사는 되레 내 말에 토라져서 쿵쾅쿵쾅 뛰기 시작하고 내 머리가 흔들리고 내 몸이 흔들리고 내가 딛고 선 이 땅이, 내가 바라는 사랑이, 내가 바라보던 그 어린 날의 별빛마저 자욱한 우주의 먼지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만다. 2. "나는 결코 미술가가 되려고 한 적이 없어요. 미술에 관심을 둔 적도 없죠. 나는 그저 한 마리 야수가 되고 싶어했답니다. 그런데, 그러기엔 내 얼굴은 너무 상냥하게 생겼어요." (Jonathan Meese)

눈 오는 풍경

Sisley, Alfred Snow at Louveciennes 1874 눈이 내리고 있다. 어두움을 가르며 빛나는 움직임으로 허공을 가르고 있다. 그 사이를 사뿐한 영혼으로 날았다. 군데군데 세찬 바람들이 뭉쳐 그를 가로막았지만, 도리어 바람에 밀려 그는 더 멀리 올라갈 수 있었다. 지구는 멀고 우주는 가까워졌을 때 눈은 사라지고 찬란한 어둠으로만 그 영혼 가를 둘러샀다. 고요가 영겁의 시간으로 밀려들고 시작과 끝이 그 의미를 상실해버릴 때, 지구는 멀어지고 우주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청춘이 지나고 있다. 사뿐한 청춘이 하얀 이빨로 영혼의 허기를 물고 가슴 속으론 잃어버린 사랑을 품으며 찬란한 어둠 속을 지나치고 있다. - 2004년 1월 13일 쓰다.

추상의 자국

점. 선. 면. 추상은 내 몸에 자국을 남기며 계절 속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진다. 오랫만이다. 미술관 나들이는. 3월 봄날 새잎마냥 여리던 내 영혼의 표피가 담배와 알코올로 둔해지고 거칠어진 서른 중반. 내 시선은 멍하고 내 발걸음은 정처없기만 하다. 나에게 행운이 있다면, 아직 내가 왜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 나에게 불행이 있다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희미한 말(言)들이 아스팔트 도로를 내달리며 내 목을 끌어당긴다. 조여오는 이 숨막힘. 이 가을, 나에게 남은 것이라곤 몇 년 전 겨울의 추억 뿐.

청담

청담(淸談) 이진명 조용하여라. 한낮에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 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 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이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헤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유리 병마다 가득 울리는 소리를 채우리라. 한 개비 담배로 이승의 오지 않는 꿈, 땅의 糧 食을 이야기하리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 이 흘러오고. ---- 내 삶이 너무 멀리 있어, 아주 오래 전에 이 시를 좋아했다는 사실마저 어색한 토요일 저녁. 팔굼치는 까지고 목은 부어있고 몸과 마음이 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