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상상

점심 식사를 끝내고 의자를 침대 삼아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귀엔 작은 이어폰, 노트북으로 프리드리히 굴다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듣는다. 사무실 창들은 다 열려있고 사람들은 다들 더위와, 장마와,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친 표정들을 하고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이런 날, 하루 종일 모차르트만 들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모차르트를 같이 들을 여인이 있고 여인 옆으로 열린 창 밖으로 정원이 보이고 밤새 떨어진 나뭇잎이며 구름들의 흔적이며 여름날의 추억들이 쌓여있다면. 기인 하품으로 오후의 고요 속으로 빠져들면 얼마나 좋을까. 여름은 깊어져만 가고 그 날 그 정원 연못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움으로 물들어 가기만 한다.

FTA반대

일본과 미국의 공통점은 강력한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의 기업들은 탄탄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키운 뒤에 해외로 진출하거나 아예 진출할 생각이 없는 기업들도 많다. 최근에 읽은 어느 경영 리포트에서는 미국 기업의 약점으로 강력한 내수 시장을 들고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미국 내 기업들의 경쟁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다. 그리고 가격 경쟁력으로는 중국 제품과 게임이 되지 않는다. 품질 경쟁력인데, 이는 이미 미국 내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격 & 품질 경쟁력을 가진 국내 기업은 이미 벌써 다 진출해 있다. (* 현대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면, 이미 미국에 생산 공장이 있으니 한-미 FTA는 도리어 미국산 자동차들이 물밀듯이 들..

화요일의 단상

어쩌면 헛된 환상, 열 여섯, 하얀 목련 같은 짝사랑이 미련스러운 따스함으로 바닷가 작은 도시를 감싸던 어느 봄날 같은, 그런 환상일지도 모른다. 새벽 세 시 퇴근. 오전 아홉시. 고객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일어난 화요일. 어제 내렸던 비(雨)들은 흐린 구름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밝음들이 미치지 않는 그늘 속으로 숨고 흐릿한 시야가 열린 창 밖으로 펼쳐졌다. 밤 사이, 그녀들은 행복했을까, 밤 사이 그들은 행복했을까. 낮이 지나고 밤이 지나고. 택시를 타고 88올림픽도로를 지나간다. 택시 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과, 월드컵 경기장 근처의 낮은 산과 언덕들, 그 옆으로 지나가는 구름들, 그리고 바람, 어느 사내의 시선, 장마철을 드리운 우울, 무료함,들, 푸른 쓸쓸함으로 가득차있는 더위,들.

KBS 교향악단 제 589회 정기연주회

아주 가끔 연주회를 보러 간다. 공짜 티켓이 생기거나 누군가의 선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싼 연주회보다 그 돈으로 좋은 음반 몇 장 사는 것이 가난한 애호가에게는 더 큰 행복이거니. 하지만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KBS 교향악단 제 589회 정기연주회. 다케미츠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레퀴엠’, 아론 커니스의 ‘새로운 시대의 춤’, 그리고 모차르트의 ‘레퀴엠 쾨헬 626’. 다케미츠는 현대 일본의 작곡가로 많은 영화음악과 현대음악을 작곡한 이다. 그냥 무난했다. 영화 음악 작곡가들이 다들 그렇듯이 편안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아론 커니스의 음악은 매우 연극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현대 대중 문화에서 많은 것들을 차용한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 가지고 있던 영역을 넓힌다..

민방위 훈련 후 잡담

오전, 민방위 훈련 참가 하지만 잠에서 덜 깬 상태였고 계속 꾸벅꾸벅 졸았음. 강남구나 서초구 민방위 훈련에서는 재태크(주식, 펀드, 부동산) 강좌도 한다던데, 내가 있었던 영등포구, 강서구에선 그런 걸 하지 않았다. 오후, 집에 오니 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고객사 미팅을 위한 간단한 문서 정리. 이번 주 내내 프리젠테이션 문서와 싸웠는데, 그동안 만들지 않았던 탓에 많이 무뎌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나름대론 문서 작성엔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보니 영 엉망이 되어있었다. 뭘 해야 하지. 어제, 파리에 전화를 했다. 파리에서 한 무용 공연이 성황리에 잘 끝났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것저것 도와드렸는데, 다행이다. 직장인이 아니었다면 파리에 갔을텐데, 아깝다. 오늘, 내일 새벽에 스..

버리다

1990년대 후반에 구입한 컴퓨터를 오늘 버렸다. 재활용센터에서 와서 수거해갔는데, 그냥 수거만 해가겠다고 했다. 못 쓰는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재활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쓸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가서 새 것처럼 만들어 파는 것이 재활용센터의 역할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오래된 컴퓨터 책상을 부셔버렸고 망가진 의자는 그냥 내다버려야할 것같다. 토요일 와인 한 병 반 마시고 필름이 끊어져버렸다. 으. 와인 마시고도 필름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일요일 해야할 일이 산더미같았는데,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아~. 루마니아산 와인이 매우 좋았다. 가격 대비 와인 맛이 비례하는 건가. 필름 끊어지는 버릇도 버려야 할 것같다. 언제쯤 과거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인가. 걱정스럽다.

신촌에서의 자정

'예술가들에게 있어서의 가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가난한 게 싫다. 현실적으로 무능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믿고 있는 바, '어떤 예술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이 둘은 이 쪽 은하계에서 저 쪽 은하계 사이만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다. 거친 통계적인 구분이지만, 예술사에서 위대하고 고귀한 예술가가 당대의 인정을 받고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던 시대는 대체로 고전주의 양식이 풍미했고 그렇지 못한 시대는 대체로 낭만주의 양식이 풍미했다. 공연 예술을 천직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그 사이에서 현실과 우리들이 바라는 세계와의 간극이 얼마나 크며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미쳐가는가에..

간송미술관

밤새 리시버 앰프에선 오래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들. 알려고 노력하지만, 늘 어떤 한계에 부딪혀 희망으로만 남아있는 음악들이 미끄러져 이른 아침의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투표 장소를 확인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입고 리시버 앰프를 끈다. 방 안 가득 책들과 음반들이 널려있고 한 켠에는 화분 몇 개가 파란 잎사귀 끝에 침묵을 대롱대롱 매단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5월 마지막 날, 간송 미술관에 도착했을 땐 이미 10시가 지나있었다. 바로 옆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 오후 1시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미술관 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비좁은 실내. 오래된 건물의 벽. 유리창 속에 들어가 있는 작품들. 하지만 대단했다. 기..

대홍포와 화분 하나

일요일 밤에 마신 차 한 잔. 월요일 근처 꽃가게에서 사온 화분 하나. 사기 화분을 구해 옮겨야겠다. 책상이 파란 잎으로 뒤덮이는 풍경을 생각해본다. 집 근처 초등학교 담장에 장미가 가득하던데, 장미 보면서 마당 있으면 저 녀석들 중 몇 가지 꺾어 화단에 심으면 좋겠다는 생각 잠시. 사람은 아파트나 빌라가 아니라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야 된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