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무더운 봄날의 연속

그동안 사용하던 Technics SL-D3 Turntable을 팔려고 실용오디오(www.enjoyaudio.co.kr)의 장터에 내놓았으나, 반응이 없다. 구입은 20만원 넘게 주고 산 판돌이인데, 12만원으로 팔리지 않는다. 가격을 다시 내려야할 것같다. 어젠 납땜 인두를 구입했다. 사용하고 있는 Dual 턴테이블의 접지가 떨어져 납땜을 하기 위해. 그러나 처음 해보는 납땜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내 인생을 붙이는 기분이 들었다. 몇 주동안 정신적으로는 아노미 상태에, 사무실에선 일로, 육체적으론 .. 견딜 수 없는 피로로. 미쳐가고 있다. 어느 순간 보니, 올해 안으로 결혼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동안 부모님의 성화를 이겨내는 것쯤이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게 얼마..

추억으로만 사네

후배가 먼 타지에서 추억으로만 산다고 한다. 추억에 자신을 의지하기 시작할수록 삶은 견디기 힘든 어떤 무엇이 된다. 중년의 여자가 남편과 아이들을 보내고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여고 시절이나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순간, 무섭고 슬프지만 조금은 감미로운 우울증의 베일이 그녀의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추억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갑자기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내 몸 속에 있던 추억이 날을 세우고 일어나 내 속에서 내 밖으로 일제히 밀려나온다. 그러나 피부의 안쪽 면에 부딪혀 튕겨져 다시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추억들. 멍하게 사무실 구석에 앉아 기형도의, 오래된 시를 꺼낸다. 추억에 대한 경멸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살아가는 것

힘들다, 힘들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지만, 요즘만큼 힘든 시기도 드문 것같다.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나에게 어울리는 일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 있는데, 난 지금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때때로 많은 말보다 침묵이 좋을 때가 있는데. 난 아직 침묵을 배우지 못했나 보다. 힘들더라도 잘 참고 견뎌야지. 그래서 그 긴 터널을 지나가야지

SOMETHIN` ELSE

SOMETHIN` ELSE 캐넌볼 애덜리 팬들은 싫어하는 앨범. 너무 마일즈 데이비스적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끼는 앨범들 중의 하나다. 그리고 Blue Note 레이블 Best 10 안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고 완성도 높은 재즈 앨범이다. 그리고 날 재즈의 세계로 빠지게 한 음악이 들어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 * 오늘 아침,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내 방에 가득한 지친 어둠이 내 몸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고 바람은 없었고 싱그럽고 활기찬 아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 밤, 머리를 다듬었는데, 그 탓일까. 내 피곤과 열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머리칼들이 강남 어느 오피스텔 일층에 위치한, 저녁이면 출근길을 서두르는 여자아이들로 북적이는 그 미용실 바닥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일까. 사무실에 앉아, 왜 ..

스토리텔링

건너편 창으로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 보인다. 밤이면 술에 취한 40대 쯤으로 보이는 사내의 팔짱을 끼고 씩씩한 걸음으로 들어가는 젊고 산뜻한 피부를 가진 여자 아이와 만날 수 있다. 그 여자의 이름은 'Feel'이다. 내가 그녀를 'Feel'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몇 명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에게 "필이 꽂혔기" 때문이다. 요즘 난 퇴근도 하지 않고 억지로 야근을 해대며 11시 쯤 사무실을 나가 라마다 르네상스 앞을 서성거린다. 이런 미친 짓을 한 지도 벌써 15일째다. 뭐, 미친 세상이니, 미친 짓을 한다고 해서 악한 행위는 아니다. 차라리 성스러운 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Feel이 꽂혀 나의 정신을 잃어버렸으니. 그리고 20일째 되는 날,..

엥시당, 혹은 Incidents

이베리아 항공사 여직원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에 진하면서도 무미건조한 화장을 하고 있었으며, 핏빛같이 붉게 칠한 아주 긴 손톱을 갖고 있었다 - 오랜 습관이 되어 버린 강압적인 제스처로 길다란 항공권들을 만지고, 접는 그녀의 손톱들 ... .... - 롤랑 바르트, 오래전 모로코에서. 점심시간, 나가지 않고 남아 모짜르트를 듣고 있다. 어젠 새벽에 집에 들어갔는데, 오늘까지 피로가 풀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삶이 힘에 부치는 오후가 시작되고 있다. 길을 걷거나 차장을 쳐다보거나 어두운 지하 속에 통과할 때나, 롤랑 바르트의 새로 나온 책을 읽는다. 이 사람도 여러 사람들처럼 차에 치여죽었다. 차에 치여죽음. 참 극적이면서도 너무 흔해 빠진 일이라 선뜻 권하고 싶은 죽음의..

Grim

Grim... 독일의 어느 학자 형제의 이름이 아닌가. 아니면 그냥 그림(畵)를 뜻하는 것일까. 찾아보니 그림동화책을 만든 그들의 이름은 Grimm이다. 대학로에 있는 술집이름인데, 이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가 오랫만에 마음에 드는 여자로 등장했다. 술에 취해 쓰러져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등장하는 인물은 늘 새로웠다. 하지만 이 새로움은 술 기운과 함께 몸 속에서 사라져간다. 어제 다시 그 곳을 들렸는데, 그 친구는 자리에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L양이 이 곳의 컬렉션은 정말 형편없다며 투덜댄다. 앞에 있는 C양과 C군은 계속 싸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이다. 어느 모임 게시판에 올라온 Michel Petrucciani Trio의 음악을 듣고 있는데 무..

르네상스의 빛과 어둠

왜 굳이 르네상스로 가야하는 거지? 차라리 고딕의 세계가 낫지 않을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모험을 나서, 끝없는 절망과 슬픔 속을 헤매는 것보다 그냥 포기하고 조용히 슬픔을 씹으면서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일 때, 굳이 우리는 그것들을 질서정연한 모습을 만들어야하는 것일까. 이라크의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성이 있고 용기가 있는 말은 허위이며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위 한 번 참가했다면서 그것을 위안하는 것일까. 르네상스는 하나는 이전 세계를 동경하는 이들과 하나는 이전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이 공존하던 세계였다.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이 후자에 속했고 유럽 대부분의 지방은 전자에 속했다. 15세기를 풍미했던(이탈리아 르네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