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아비정전

아비정전을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꽤 오래 전에 디자인을 전공하던, 나보다 세 살 많은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꿈에서 만나자를 이용했지만, 특별하지 않았나 보다. 따지고 보면 난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그런 걸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얼굴은 옆모습을 그려져 있으면서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이를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면성의 법칙은 권위에 대한 인정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주인공들의 대사는 운문으로 처리되던 근대 초기의 희곡도 정면성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말을 머뭇거리고 등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이러한 정면성의 법칙이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난 정면성의 법칙 속에 있지 않았다.(정면성의..

달의 그리움

오늘 햇살이 좋았다. 근처 공원엔 들뜬 사람들로 가득했다. 피곤한 인생에 여기저기 주름이 잡히고 때가 묻은 양복을 세탁소에 맡기고 오면서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파랬다. 내가 아주 오래전 태어났을 때에도 저 빛깔이었을 게다. 내 방에 앉아 그리그(Edvard Grieg)의 페르귄트(Peer Gynt)를 들었고 무소르그스키(Mussorgsky)의 가곡을 들었다. The Nursery, Sunless, Songs and Dances of Death를. 보들레르의 을 읽었다. 이 글을 읽을 사람을 위해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언제나 두 가지 갈망이 있는데, 하나는 신을 향한 것, 다른 하나는 악마를 향한 것이다. 신 또는 정신적인 것에의 기원은 상승하려는 욕망이요, 악마 또는 ..

So What?

학동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빠져나오면 택시들이 일렬로 서있다. 개인택시들은 없고 다들 영업용들이다. 한결같이 아침 일찍 나와 천천히 지쳐갈 무렵의 사내들이 몰고 있다. 몇 명은 뒷좌석에 세 명을 태우기 위해 안가힘을 쓴다. 몇 명의 손님은 이 황당한 풍경 속에서 어쩌지 못한다. 이 풍경은 학동역에서만 두드러지는데, 다른 역에는 감시카메라가 달려있어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뿐이다. 나도 처음 마주하였을 때, 참 황당하였는데, ... ...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다. 늘 늦게 일어나고 늘 피곤하다. 사무실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 늘. 언제나. 금방 전화가 왔고 글쓰기의 리듬이 깨져버렸다. So What? 컨설팅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중에 하나다. "그래서 뭘?" 참..

극적인 우울증

밤 늦은 시각. 서쪽 중간 쯤에 있는 어느 역, 근처에는 오래 전 공군사관생도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었던 운동장을 가진 공원이 있는 그 역을 향해가던 객차 안에서, 황급한 발걸음으로 날 덮친, 꼭 매혹적인 알몸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여신같은, 그 우울증의 정체를 난 알지 못한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내 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오마르 카이얌이 매혹된 바 있고 그 이후 무수한 시인과 예술가들의 벗이 되어주었던 그 존재, 그 존재를 만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각, 근대의 표상인 내일이라는 미래로 인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내 방을 열고 말았다. 결국 혼자 약간 미친 듯, 약간 슬픈 듯, 약간 고독한 척 하면서 맥주 한 병을 마셨지만, ... ... 오늘까지 난 그 우울증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

작은 아파트 하나 얻어 혼자

작은 아파트 하나 얻어 혼자고양이 키우면서 살고 싶다. 고양이 먹이 주면서 아침 떠오르는 해를 쳐다보며 삶을 비관하고 싶다.순환적 역사관을 굳게 믿으며 내 생 다시 꽃 필 날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렇게 혼자 살고 싶다.봄에는 이름 모를 꽃향기가 스며들고가을이면 낙엽 지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아파트였으면 좋겠다.여름에는 바람은 불되, 아무도 찾지 않는 아파트이면 좋겠고겨울에는 눈이 쌓이고 밤의 하늘이 낮게 드리우고 사랑하는 여자만 찾아오는 그런 아파트였으면 좋겠다. 그런 작은 아파트에서, 오래된 오디오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말러나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살고 싶다.낮고 긴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 중 한 권을 꺼내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책을 읽으며 살고 싶다. 그렇게 나, 그렇게 혼자 고양..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글

문화 산업과 관련해 몇 번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하였다. 고부가가치라고는 하지만, 성공확률로 따진다면 제조업과 비슷하거나 그 이하이다. 성공하는 경우의 부가가치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지만.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이창동 장관의 글이다. 과연 공직 사회를 얼마만큼 잘 리드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다. 처음 드리는 인사말 안녕하십니까. 이창동입니다. 제가 문화관광부 장관이란 중책을 맡은 지 어느새 두 주일이 훌쩍 지났습니다. "취임식을 생략하는 대신 취임사는 인터넷으로 올리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이제사 인사의 글을 올려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럴싸한 포부나 의례적인 인사보다는 뭔가 생각을 가다듬어 말씀을 드리고자 했지만,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

miscellaneous, 또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돈 많이 주고 산 오디오가 말썽이다. 앰프에 문제가 있는 건지, 스피커에 문제가 있는 건지, 계속 한 쪽 스피커 소리가 죽는다. 오늘 테스트를 해보고 바꿀 생각이다. 빚을 내어. 아마 미친 짓이라고 혹자들은 말할 지도 모른다. 통장에서 고작 몇 십만원 있는 주제에. 공과금 내면 사라지는 돈인데. 하지만 통장에 돈 없어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음악 들을 때 한 쪽 스피커가 죽는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크니 어쩌겠는가. 오랫만에 토요일날 휴식을 취한다. 내가 원하는 걸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걸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참 부럽고 속이 타고 내 경제적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내 고매하기 짝이 없는 순결주의는 시대 착오적이고 혐오스..

염증

Mary Flannery O'Connor, 1925.3.25 ~ 1964.8.3 어제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식사를 많이 한 것이 원인이 된 듯하다. 그런 와중에 11시까지 일을 했고 밤새 배를 잡고 뒹굴다 급기야 아침에는 토하고 말았다. 이틀이 지나가고 있건만, 무식하게 약을 먹고 있지만, 배는 계속 아프다. 오늘 일찍 집에 들어왔지만, 몇 시간을 잤지만, 배는 계속 아프다. 아픈 몸이라. 무척 낭만적이다.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병"를 영어원서로 사서 읽고 있는데.. 몇 페이지 읽었나. 병하니, 프란네리 오코너가 생각난다. 홍반성난창으로 죽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생의 구원이라는 테마만 생각했다니. 그리고 보면 나는 죽지 않는다면서 죽은 프랑스의 어느 소설가도 있었는데.

하나비

하나비를 보다 잠이 들었다. 바다가 참 많이 나오는 영화다.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위로 총성이 두 번 울릴 때, 난 눈을 감고 코까지 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네모난 브라운관 속에 갇힌 파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으로 두 번의 총성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총성 끄트머리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생(生)에의 열망. 머리가 아프고 손마디는 떨리고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어디 멀리 도망쳐야지. 도망쳐선 소문으로만 존재해야지.

하나비

하나비를 보다 잠이 들었다. 바다가 참 많이 나오는 영화다.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위로 총성이 두 번 울릴 때, 난 눈을 감고 코까지 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네모난 브라운관 속에 갇힌 파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으로 두 번의 총성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총성 끄트머리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생(生)에의 열망. 머리가 아프고 손마디는 떨리고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어디 멀리 도망쳐야지. 도망쳐선 소문으로만 존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