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936

모데라토 칸타빌레,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마르그리트 뒤라스 뒤라스의 세기도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 그의, 그녀의 세기가 있었듯이, 뒤라스에게도 그녀만의 세기가 있었다. 그녀가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그녀 옆엔 늘 서른 다섯 살 연하의 젊은 연인이 주름진 뒤라스의 손을 잡고 그녀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녀의 유작 ‘C’est Tout그게 다예요’는 마치 젊은 날의 그녀가 찾아 헤매던 언어와 사랑의 완결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얇은 책 위로 젊은 연인의 얼굴이 겹쳐지곤 하던 시기도 있었다. 191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에서 태어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알베르 카뮈와 같이, 식민..

부영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부영사 -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정우사 부영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1984. (민음사 이데아 총서 중 한 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98쪽) 그들은 계절풍 속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혹은 그녀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어떤 행동을,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그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혹은 계절풍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가던 서사(narrative)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 ‘놓침의 독서’는 나의 기억 속에 몇 개의 이름만을, 몇 명의 존재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 그녀, 그, 그녀, 그, 그, ...... 그와 그 사이, 그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새물결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지음), 박진우(옮김), 새물결 이 책 전체의 핵심 주제는 바로 정치의 근본 범주를 ‘주권/벌거벗은 생명’의 관계로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를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비오스,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이 과연 어떤 존재론적 층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근대 정치의 핵심 범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해명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근본 주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23쪽, 옮긴이 서문 옮긴이의 서문을 옮기지만, 이 책은 초심..

퍼플오션전략, 인현진(지음)

퍼플오션전략 - 인현진 지음/아름다운사람들 퍼플오션 전략(Purple Ocean Strategy)은 포화 시장을 상징하는 레드 오션(Red Ocean)과 틈새 시장(Niche market)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는 블루오션 전략의 장점들이 조합된 미래 지향적 개념이다. 퍼플오션 전략은 일상의 평범한 문제와 현상을 낯설게 보고 재정의(problem-Redifine)하는 과정을 통해 재창조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 삼성경제연구소 IDEO, 셈코, 구글, 낫소스, 루이비통, 앱솔루트 보드카, 움프쿠아 은행, 맨체스트 유나이티드, 래플스 병원 등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기존 비즈니스 전략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기업에 대한 보고서 같은 책이다. 기업들의 선택은 매우 탁월하다. 그 다음엔 보고서의 ..

뮤지컬을 꿈꾸다, 정재왈(지음)

뮤지컬을 꿈꾸다 - 정재왈 지음/아이세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읽히게, 책을 만든 의도가 궁금해진다. 내가 책에 대해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한국의 독자 수준이 형편없다는 말인가. 아마 대부분의 출판기획자들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이 책은 너무 쉽게 만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문화교과서'라는 시리즈 제목이 무색할 정도다. 뮤지컬의 역사, 뮤지컬 제작, 대표 뮤지컬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각 부분은 뮤지컬 초보에게 간단한 안내서로 기능하겠지만, 그 뿐이다. 너무 편하게 쓴 탓에, 전문적인 부분을 건들지 못하고 있는 단점이 너무 눈에 보인다. 실은 비전문가가 쓴 책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나라도 뮤지컬 관련 서적들을 읽고 이 정도의 책을 ..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 마틴 맥퀄런 지음, 이창남 옮김/앨피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가 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장도 있다. 아예 책 전체가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다음 주체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치 암호처럼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끝까지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든다. 몇몇 독자는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로만 병렬적으로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독자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악명을 떨치니 말이다. 아도르노도 이에 못지 않다. 아도르노는 ‘글쓰기’를 자신의 사상에 대한 실천으로 여겼다. 불문학을 전공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독일어로 글을 쓴 아도르노에 빠진 것도 독특하기 그지 없는 아도르노식 글쓰기 탓은 아..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인상과 풍경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엄지영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엄지영(옮김), 펭귄 클래식 독자 제위(諸位). 여러분이 이 책을 덮는 순간 안개와도 같은 우수(憂愁)가 마음속을 뒤덮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어떻게 쓸쓸한 색채를 띠며 우울한 풍경으로 변해 가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지나가는 모든 장면들은 추억과 풍경,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나의 인상(印象)이다. 아마 현실이 눈 덮인 하얀 세상처럼 우리 앞에 분명히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 마음속에서 열정이 분출되기 시작하면, 환상은 이 세상에 영혼의 불을 지펴 작은 것들을 크게, 추한 것들을 고결하게 만든다. 마치..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 조중걸 지음/베아르피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지음), 베아르피, 2009. '마술과 의미를 동시에 잃어'버린 세계, 사막이 되어버린 세계. '우리는 거울만을 보도록 운명 지어져 있고, 우리의 운명은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오랜 역사는 현대의 비트겐슈타인에서 머물러 있고, 그는 거짓된 말보다 진실된 침묵을 택한다. 이 얼마나 아찔한 귀결인가. 책은 짧고 문장은 단순하다. '철학은 관념적 독단과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양 끝으로는 하는 스펙트럼'이고, 우리 '인간은 관념론자가 되거나 유물론자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 아니 이는 배운 사람들(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관념론..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대단한 찬사 속에서 읽을 만한 소설책은 아니다. 하지만 대단한 찬사 속에서 이 소설을 읽었을 독자들에게 아마 그 찬사는 그대로 전달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관심과 자기 보호로 뒤범벅이 된 폭력성'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주제의식이라면,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라는 단편은 매우 잘 씌여진 소설임에 분명하다. 그녀의 작가적 재능은 폭력적인 이 세계나 이 세계 속의 개인들에 대한 집요한 탐구 의식, 또는 진지한 성찰에 있기 보다는 번뜩이는 재치가 묻어나는 짧고 강렬한 스토리라인에 있는 듯하다(그래서 그녀의 많은 단편들이 영화로, TV 드라마로 재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곳에서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