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936

뉴욕삼부작, 폴 오스터

폴 오스터(지음), 한기찬(옮김), 뉴욕 삼부작 The New York Trilogy, 웅진출판, 1996 초판2쇄. 어둠 속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밀어 넣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내 실수와 과오, 내 조그마한 상처, 또는 내 고귀했던 사랑마저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었을 때, 왜 누군가가 날 찾는 것일까. 소설은 누군가를 계속 찾아 다니다 그 누군가를 잊어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실은 오래 전부터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고 그것을 그 스스로 선택했으며 그렇게 남은 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날 찾는 따위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 전부터 세상은 나의 것이 아닌 타인들의 것임을. 그..

박물관의 탄생, 전진성

전진성(지음), 박물관의 탄생, 살림, 2004. 초판 알튀세르가 강압적 국가 기구(Repressive State Apparatus)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우리의 삶 전체가 정치적인 기구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 전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알튀세르에게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가족, 학교, 미디어 등을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로, 어쩌면 군대, 경찰 제도보다도 더 위험한 기구들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은 분명 알튀세르의 기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아미앵에서의 주장'(솔출판사, 현재 절판)에서 여기에 대한 알..

라파엘전파, 팀 베린저

라파엘전파 - 팀 베린저 지음, 권행가 옮김/예경 팀 베린저(지음), 권행가(옮김), , 예경, 2002년(초판) 예쁜 그림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라파엘전파. 대다수의 미술사가들이 그 가치를 폄하하고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미술, 그래서 '위선과 기만'의 시대로 알려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미술 양식.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라파엘 전파 화가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 어쩔 수 없이 그 가치를 인정해주기에는 그들의 작품들이 그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하고자 노력한 책이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시작으로 존 에버릿 밀레이, 번 존스, 매독스 브라운 등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존 버거(지음), 김우룡(옮김), , 열화당, 2004년 초판. 신분증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혹은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느라고 지갑을 열 때마다, 나는 당신 얼굴을 본다. (중략) 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 있는 꽃 한 송이, 우리로 하여금 산맥보다 더 오래 살게 하는 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 11쪽 저녁이 올 때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거울 속의 저 라일락 가지처럼 자리한다. - 70쪽 * *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명쯤 될까. 매번 마주하게 되는 마을이며 사람들이 낯설더라도 움츠리지 않고 이방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는 몇 명이나 있을까. 존 버거의 은 정해진 방향을 가지지 않는 작은 글 모음이다. 정해..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 데니스 N.T. 퍼킨스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 - 데니스 N. T. 퍼킨스 지음, 최종옥 옮김/뜨인돌 데니스 N.T.퍼킨스(지음), 최종옥(옮김),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 뜨인돌출판사 살아가는 건 어떤 것일까. 조선 시대에 태어난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그 고장을 벗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뜻밖의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근대자본주의문명은 삶을 전투로, 극한 상황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겨우겨우 살아나갈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실존인물이며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는 643일간 남극 대륙 속에서 죽음을 넘나들며 28명의 대원들을 무사히 귀환시켰다. 이 책은 이러한 섀클턴의 남다른 지휘력에 대한 책이다..

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제레미 리프킨(지음), 이영호(옮김), , 민음사, 1996(1판), 2001(23쇄) 청년 실업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실업이 어떤 이유로 생겼고 이 현상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지적하는 이는 없는 듯하다. 2004년 7월 현재 전체 실업률은 3.5%였다. 그리고 청년(15세-29세) 실업률은 7.6%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를 참고한다면 한국의 실업률은 해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상시 구조조정 체제가 구축되어가고 생산성 향상과 노동 유연성 확보라는 미명 아래 이제 노동자가 필요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이 책이 나왔을 1996년에 읽었다면 설득력이 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2004년에 읽은 이 책은 한국의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퀜틴 스키너(지음), 신현승(옮김), , 시공사, 2001 니콜로 마키아벨리(지음), 강정인(옮김), , 까치, 1994(1판), 2000(9쇄) 최근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르네상스에 대한 찬사가 19세기의 유산임을 알았다. 그간 공부를 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 정도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 매우 많은 의구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르네상스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19세기의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편견일 수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된 셈이다. 이런 문예 부흥의 시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은 다분히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여지기도, 높게 평가하기에도 애매하다. 그는 공공연하게 '비열한 권모술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문예출판사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지음), 지정숙(옮김), 문예출판사 로맹 가리, 필명인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짧은 프랑스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잠시 눈가를 붉혔다. 오랫만에 소설을 읽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이 좋아졌다. 그리고 늙는다는 것, 추해진다는 것, 그리고 육체가 썩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소설가는 자살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로맹 가리는 1980년 권총 자살로 죽는다. 아마 로맹 가리는 모하메드가 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고통 받았지만, 그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어떤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결국에는 생의 안락함을 구하게 되는 어떤 소년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소년..

고고학자와 함께 하는 이집트 역사 기행, 요시무라 사쿠지

고고학자와 함께 하는 이집트 역사 기행 요시무라 사쿠지 지음, 김이경 옮김, 서해문집 이집트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투탕카멘에 대해서, 스핑크스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 예술에서 최초로 ‘카논’이 등장했고(그리스가 아니라) 여성에게 왕위계승권이 있었으며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이집트 사람들이 행복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자세히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종류의 지식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집트와 관련된 것들이 아닐까 싶다. 가령 지금 세계 지도 속에 이집트라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이 나라가 기원전부터 계속 있어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343년에 이집트인들이 다스리는 이집트라는 나라는 세계..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지음), 문학과지성사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대학 시절 읽고 난 이후 최윤은 성실한 한국문학 번역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코는 없다'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으나, 그들의 하나코처럼, 나에게도 그 짧은 소설은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힘을 내고 싶지만, 기운을 내고 싶지만, 다시 한 번 날아오르고 싶지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말해, 힘을 내어본 적도, 기운을 내어 본 적도, 날아올라본 적도 없다는 걸 ... 하지만 안개 속에선 안전하지. 어떤 이유로 '하나코는 없다'가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걸까. 문학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다시 읽고 난 다음, 문학상을 받을 만한가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하긴 사람들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