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937

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오정희(지음), , 황금부엉이, 초판3쇄 산문집을 출판한 뒤, 보름 만에 3쇄를 찍은 이 산문집을 보면서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게 꼭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도리어 읽을 책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신뢰할 만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휙 돌고 나오고 나온다. 일간지에 실린 광고 생각부터 오정희가 가지는 개인브랜드까지. 얼마 전 어느 신문 기사에 한국 문단은 정부가 먹여 살린다는 짤막한 시평이 실렸다. 소설 써서 정부 지원금 받고 재단 지원금 받고 하면 연봉이 한 이 천 만원 정도 된다는 웃지 못할 글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진짜 밥벌이용 소설인 셈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출판해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원금 신청에 사용하고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도, 서점에 가서 책을..

카사노바의 베네치아, 로타 뮐러

로타 뮐러(지음), 이용숙(옮김), , 열린책들, 2004 베네치아의 모든 사람들은 무대를 가로질러 가듯이 지나간다. (중략). 그러면서 언제나 오로지 그 장면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 연극배우들처럼 보인다. 극은 오직 그 곳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이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원인도 제공하지 못하고, 그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중략) 베네치아는 모험의 이중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뽑혀 바다에 떠 있는 꽃처럼 인생에서 뿌리 없이 유영하는 모험 말이다. 베네치아는 모험의 고전이었으며 현재도 그런 존재로 남아 있고, 온갖 모험의 총체가 갖는 최후의 운명을 구체화한 도시다. 이 도시는 결코 우리 영혼의 고향이 될 수 없으며, 다만 하나의 모험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적 체험, 혹은 늙어간다는 것, 무디어져간다는 것

개인적인 체험 -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을유문화사(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으나, 이제는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귀한 전집이 되었다.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업적을 이룬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이해가 한국에서도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새로 홈페이지를 단장하면서 이전에 쓴 글을 추스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글. 히미코를 따라 소리내어 있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인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런 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히미코에겐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로 기능하고, 버드에겐 장애를 가진 아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로 기능하는, 그래서 세상은 평온 속에서 이어나가고 상처와 방황은 눈물로 스스로 아물어가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스물 ..

존재와 무 -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변광배

존재와 무 - 변광배 지음/살림 존재와 무 -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변광배 지음, 살림, 2005 오래 전 삼성출판사에서 두 권으로 번역되어 나온 사르트르의 를 읽으려다 여러 번 실패하고 만 나로선 이 책은 꽤나 유용한 개설서의 역할을 했다. 책의 삼 분의 일은 사르트르에 대한 이야기로 할애되어 있으며 나머지 삼 분의 이가 에 나온 주요개념들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주요 개념들로는 ‘무신론과 존재의 우연성’, ‘의식과 사물 그리고 의식의 지향성’, ‘무와 무화작용’,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실존의 불안과 자기 기만’, ‘타자와 시선’, ‘신체’, ‘시선 투쟁과 갈등’,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들’, ‘실존의 세 범주: 함, 가짐, 있음’ 등이다. 철학 입문서라는 생각..

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

파이트 클럽Fight Club, 척 팔라닉(Chuck Palahniuk) 지음, 최필원 옮김, 책세상, 2002년 말라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타일러가 다시 나타난다. 마치 마술을 부리듯. 우리 부모님도 이런 기술을 무려 오 년 동안 서로에게 썼었는데. - 87쪽 이 문장은 매우 신기했다. 하지만 금방 속고 만다. 어떤 트릭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부모님도 그랬다고 하니, 혹시 사랑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분석이나 의미 부여를 위한 상황 설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착각이었다. 정신병자들이 가지는 소설적 매혹은 대단하다. 이와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리고 매우 ‘손쉬운’ 방법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충격을 받았을 끝의 반전은, 실은 의도된 것으로서 소설..

흉터와 무늬, 최영미

흉터와 무늬 - 최영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램덤하우스중앙, 2005년 도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죽은 언니 이야기? 아니면 그걸 뒤죽박죽 섞어놓은 가족 이야기?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 이야기? 그럼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좋을까? 그런 가족이 있었다고? “지난 4년은 시인이었던 과거의 나와 소설가가 되려는 내가 서로 투쟁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천매가 넘는 분량을 써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 한겨레신문 2005년 5월 11일자 이 소설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저 가족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러기..

창녀, 넬리 아르캉

창녀 Putain 넬리 아르캉(지음), 성귀수(옮김), 문학동네, 2005. 1. 신시아에게. 신시아, 책에서만 보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어. 나도 너처럼 마른 여자가 좋아. 그러니 네 외모에 대해선 그렇게 많이 이야기할 필요 없어. 그러면 그럴 수록 너는 예쁘지 않으니깐 말이야. 하지만 네 맑은 눈동자는 나에겐 부담스러웠어. 너의 눈동자는 궁지에 처한 17살 소녀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드러낼 때의 그 빛깔을 가지고 있더군. 그러나 소녀는 한없이 사랑하는 어떤 이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기만 하면 금새 풀려버리는 그런 종류야. 신시아. 그러니, 그냥 울어버려. 그게 더 낫지 않을까. 다행이야. 너와 키스만 했다는 게. 아마 너와 관계를 맺었다면 너는 날 공격했을 꺼야. 형편없다면서..

기로에 선 자본주의, 앤서니 기든스/윌 허튼

기로에 선 자본주의 앤서니 기든스/윌 허튼(편저), 박찬욱/형선호/홍윤기/최형익(옮김), 생각의나무, 2000년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질문을 하면 과연 몇 명쯤 ‘좋다’라고 답할까. 그렇다면 나쁜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매우 편파적인 책이다. 윌 허튼은 분명한 어조로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고 앤서니 기든스도 그것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습게도 이 책에 정답은 없다. 아마 정답이 나와있는 책은 없을 것이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먹어치워 버리는 현대 자본주의가 그 정답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좌파, 또는 중도 좌파의 시각이 아닌..

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

, 아서 단토(지음), 이성훈/김광우(옮김), 미술문화, 2004년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다 읽고 난 다음 돈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더구나 꽤 저명한 사람의 책이라, 내심 기대를 했는데, 거참, 한심하지. 예술의 종말이란 낯선 주제가 아냐. 이건 헤겔 미학의 주제야. 여기에서 ‘종말(End)’는 곧잘 근대성에 반대하는 후기 근대주의자들의 어투이기도 해. 그런데 여기에서 약간 유머러스한 건 단토는 헤겔을 끔직하게 좋아하는데, 후기 근대주의자들 대부분이 지독하게 헤겔을 싫어한다는 점..

명화를 보는 눈, 다카시나 슈지

명화를 보는 눈 다카시나 슈지 지음, 신미원 옮김, 눌와 각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면서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적절하게 역사적인 배경을 언급하고 다른 시대의 작품과의 비교, 다른 예술가의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 읽는 이의 이해를 돕는다. 누가 읽어도 괜찮은 책이다. 개별 작품들 위주로 강의하는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하기도 적당한 책이다. 각 작품들에 대해 이 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미술 작품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궁극적인 결론은 하나일 수도 있지만(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둘만한 문장 몇 개를 적어본다. 산드로 보티첼리, “사실 이 그림의 구성은 언뜻 보아 연극 무대를 연상시킨다.”(21쪽)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