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 27

내 마음, 쓸쓸한.

이우환, 사방에서(From the four direction), 1985 다행이다. 이우환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지니. 내가 조금 더 나이가 들었고, 내가 조금 더 일찍 돈을 벌기 시작했다면 이우환의 작품을 살 수 있을련지도 모르리라. 기회가 닿으면 포스터 액자라도 구해야 겠다. 가을, 살찌는 계절이지만, 나는 지쳐가기만 한다. 아마 내 나이 또래의 다른 직장인들도 그럴까? 하긴 이런 때가 있으면 저런 때도 있는 법. 오후 외부 회의를 끝내고 들어온 사무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아래 시를 읽는다. 生의 쓸쓸한 오후를 生의 쓸쓸한 오후를 걸어갈 적에 찬란하여라 또 하루가 가는구나 내 무덤에 풀이 한 뼘쯤은 더 자랐겠구나 - 최승자 ( 2013년 가을호 수록) (* 위 시는 htt..

마음, 나쓰메 소세키

마음 -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문예출판사 마음, 나쓰메 소세키(지음), 김성기(옮김), 이레 1.나쓰메 소세키, 무려 1세기 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동시대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근대성(modernity)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리라. 이번 소설도, 내가 이전에 읽었던 소설과 비슷하게, 큰 사건이 없이 한 편의 풍경화처럼 이야기는 조용히 흘러간다. 소설의 전반부는 나와 선생님이 만나고 가깝게 되는 과정을, 소설의 후반부는 선생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한 부분은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머지 한 부분은 독백에 가까운 편지로만 구성된다. 그런데 누군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대화가 아닌 '글로 씌어진 편지'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고 ..

미래에 대한 불안

자연스럽게 육체의 나이에 익숙해지는 2013년.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 쓸쓸해지는 나이. 사십대. 날씨 변화에 터무니없이 민감해지(또는, 아프)고, 어린 아들의 웃음에 눈물이 나고(고마워서) 아내의 잔소리가 듣고 싶어지는(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 끝도 없이 물컹물컹해지는 마흔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지나간 젊음 위로 쌓여 얼어간다. 얼어붙은 불안은 깊고 날카로운 냉기를 시간 속으로 밀어넣고. 잠시 내일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내 주위를 피한다. 미래는 무섭고 현재는 견디기 어렵다. 현대 문명은 어쩌면 과거 문명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불안들을 켜켜히 쌓아올려놓은 것은 아닐까.

가을 어느 날, 커피의 사소한 위안

가을 햇살이 비스듬하게 바람 따라 나풀나풀거렸다. 커피 향이 거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대비되는 빛깔끼리 대화하는 법이 없는 도시에는 외로움만 흘렀다. 투덜되는 쓸쓸함 앞에서 커피는 사소한 위안이 되었을 뿐, 결국엔 둥근 테이블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푸른 하늘 위로 떠나버렸다. 가을이 왔다. 그리고 가을이 갈 것이다. 해마다 그랬듯이.

'책과 세계'(강유원) - 독서모임'빡센' 1차 모임.

틀에 박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딱딱하고 무거운 책을 끝까지 읽기도, 힘겹게 다 읽는다고 하더라도, 과연 제대로 읽었는지, 다른 이들은 혹시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아리송할 때가 많다. 이것이 독서 모임 ‘빡센’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첫 책으로 강유원의 ‘책과 세계’(살림)를 선정했다. 책은 얇다. 두 번째 책으로 선정된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가 무려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인데 비해, 첫 번째 책은 두 번째 책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얇고 가볍다고 하여 읽기 만만한 책은 절대 아니다. 도리어 무겁고 두 세 번에 걸쳐 완독해야 할 책에 가깝다. 모인 이들은 책을 즐겨 읽으나, 독서 모임에 경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나 또한 독서 모임에 익숙하..

침묵에의 지향

잠자리에 일찍 들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가라 앉고 까닭 없이 끝 간 데 모를 슬픔으로 가득 찰 때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거나 글을 읽거나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악기 하나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지만, 지방 중소 도시에서 자란 터라 학원도 많지 않았고 여유도 되지 못했다. 그 흔한 기타 하나를 사놓긴 했지만, 몇 곡 연습하다 그만 두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기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버린 적이 없는데.) 우울할 때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지난 연말부터 무너진 마음이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 쫓기듯 살아온 걸까. 아니면 게을러져서. 그것도 아니라면, 판도라의 상자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인터넷 서점에..

어느 월요일 새벽

일본의 어느 공장에서 나온 지 30년은 더 되었을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은 잘만 돌아가는데, 중국의 어느 공장에서 나온 지 불과 10년 남짓 지난 티악 시디플레이어는 요즘 들어 자주 지친 기색을 드러내었다. 하긴 나도 요즘 너무 지쳐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고 싶지만, 쓰러지지 않는 걸 보면 나이를 괜히 먹은 것 같지 않다. 작은 회사에 들어와서, 기획에, 홍보마케팅에, PM에, 경영 관리에, 인사에, 영업에, …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왔다. 그런데 요즘 문득 내 자리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해졌고 끝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고객사를 2배로 늘렸지만, 온전히 내 성과로 보기 어렵다. 문서 작성이야 도가 텄지만, 과연 문서가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는가에 대해서도 이젠..

Beautiful day

They were silent for a while. "Beautiful day," she then said through a sigh 숨쉬기 조차 힘든, 전날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채, 더위와 땀, 거친 숨소리와 낯선 화장품 향과 향수 내음이 실내 에어콘 소리와 뒤범벅이 된 지하철 2호선 객차 안에서 서서, 소설을 읽다가 한참을 중얼거렸다. 내 기묘한 일상이 너무 어색한 요즘이다.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환상 소설의 한 토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낯선 언어의 쓸쓸한 반어는 내 시선에서 한참을 머문 후, 다음 페이지로 향했다. 점심 식사도 거른 채, 어느 수요일의 정오는 슬프게 흘러간다.

모짜르트...

요즘 너무 바쁘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책 두 권 읽고 리포트를 하나 써야 하고, 모짜르트의 대관미사(KV 317)을 무려 10번은 듣고 가야 한다. 외워오라고 시키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을 정도니. 내일까진 여름에 있는 아트페어를 위한 몇 개의 원고를 써야 하고, 회사에서 PM을 맡은 다른 프로젝트에 몇 개의 다른 업무가 추가될 듯 하다.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개인적 일엔 무관심해져 버렸다. 그러다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요즘 내 사는 모습이 딱히 좋아보이지 않아 보인다. 쓸데없는 자기 반성이랄까. 근처에 사는 친구라도 있으면 소주라도 한 잔 하면 딱 좋은 밤이다. 사무실 근처에서 사온, 브랜딩된 원두 커피 향이 좋다. 오디오에 모짜르트의 대관 미사 CD를 올려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