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936

진실된 이야기, 소피 칼

진실된 이야기, 소피 칼(지음), 심은진(옮김), 마음산책 자기 전에 소피 칼을 만나다. 그녀가 만든 이미지들 사이로 흐르는 활자들. 하지만 서사적이기 보다는 회화적이길 원하는 그녀의 텍스트들 앞에 서서 이미지들이 움직였다. 섬세하면서도 단조로운 그녀의 산문은 이미지들과 겹쳐져 사뿐하고 경쾌한 운율을 만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보면서, 박상순과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다. 한 명은 시어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고 한 명은 이미지들로 통해 놀라운 현대적 사유를 보여주었던 사람이었다. 한 명의 시집을 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한 명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지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소피 칼의 이미지들이 궁금해지는 밤이다. 진실된 이야기 - 소피 칼 지음, 심은진 옮김/마음산책

미술시장의 유혹, 정윤아

미술시장의 유혹, 정윤아(지음), 아트북스, 2007 제법 묵직하고 비싼 가격에,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쉽고 재미있게(그림 가격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읽힌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 이 책 읽기를 선뜻 권하고 싶지는 않다. 미술품 투자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권할 만한 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먼저 읽는 건 좋지 않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이 책은 현대 미술 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 이후에 읽기 적당한 책이기 때문이다. 책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 미술 시장의 동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전 세계 미술 시장의 절반 가까운 금액이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세계 미술 시장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지음), 실천문학사 제법 탄탄하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표현력을 가진 김서령의 첫 소설집 읽기의 시작은 매우 유쾌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 요즘 작가들은 왜 여기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불쾌해졌다. 도리어 뒤에 찬사에 가까운 평문을 쓴 방민호(문학평론가)나 소설가 이혜경, 문학평론가 서영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러 단편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리고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 이 얼마나 손쉬운 작법인가.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소설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신과 같은 권능을 부여받는다고는 하지만, 이 젊은 소설가의 세계 속에서 곧잘 사람들이 죽고, 그 옆의 주인공들은 슬퍼하다가 지쳐 도망가..

사물들, 조르주 페렉

사물들 Les Choses, 조르주 페렉(지음), 허경은(옮김), 세계사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정해진 환경(콘텍스트) 속에서 인물(텍스트)가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이 세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다. 이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은 전형적인 환경과 전형적인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바탕으로 이 세계가 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력한다. 이렇게 보면,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작법은 에밀 졸라와 닮아있다. 지극히 유희(놀이)적이라는 점. 실험도 일종의 놀이나 게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결말을 알 수 없는. 조르주 페렉의 을 읽으면서 그가 등장시킨 인물이나 ..

세잔의 산을 찾아서,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을 찾아서 - 불멸의 산 생트빅투아르 기행 페터 한트케(지음), 이중수(옮김), 아트북스 세잔을 좋아하는 나. 전후 독일문학의 가장 실험적인 소설가 중의 한 명은 페터 한트케가 세잔에 대해서 적었다? 바로 사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하지만 사 둔 지 몇 달만 읽었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다. 책의 내용도 평이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바의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세잔에 대한 현대 작가의 독특한 시각이 농후하게 묻어나오길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세잔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산문집에 가깝다. 한 쪽에서는 세잔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고 한 쪽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는 산문집이다. 이는 나쁜 시도가 아니다. 세잔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지음), 돋을새김 여름날의 거친 숨소리가 세월의 변덕을 닮아가던 날들이 지나고, 새벽의 찬 바람과 매미 울음소리, 화단의 나무소리, 도시의 시멘트 소리가 내 청춘의 아침을 가득 채운다. 어제 반 년 만에 간 강서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빌려왔다. 그 중 한 권인 . 김영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을 갖고 있는 이라면, 시인들의 초상을 그린 화가로 알고 있을 테고, 시를 좋아한다면 그를 시인으로 여길 터이고(문학과 지성사에서도 그의 시집이 여러 권 나왔다), 무용가이거나 무용애호가라면 그를 무용평론가로 기억할 것이다. 어제 도서관에서 잠시 들춘 8월호에서 나는 김영태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7월에. 이제 이 책은 사자(死者)의 책(書)이..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그는 무척 흥미로운 작가이다. 그의 이론에는 문학적 수사와 철학적 직관이 번득이며, 자기 스스로 끊임없이 '비주류'로 내모는 듯한 인상마저 독자에게 풍긴다. 오랫만에 발터 벤야민에 대한 책을 꺼낸다.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 책에 인용된 발터 벤야민의 글 일부를 옮긴다. 모든 친밀한 개인적 관계 역시 날카로운 명료성의 광선으로 조명된다. 이러한 명료성은 거의 비인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지될 수 있는 인간 관계는 거의 없다. 돈은 한편으로는 모든 중대한 관심사의 핵심에 도사리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돈으로 인해 거의 모든 인간 관계가 차단되고 파괴된다(자연적 관계와 윤리적 관계 모두 마찬가지다). 따라서 비반..

책들의 우주 2007.08.13

Marketing Luxury to the Masses, 파멜라 댄지거

매스티지 마케팅(Marketing Luxury to the Masses) 파멜라 댄지거(지음), 최기철(옮김), 미래의 창 이 책의 장점은 풍부한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이론적이다. 또한 마케팅 현장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마케팅 노하우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인 기법을 알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은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일반 대중을 고객으로 하는 범용적인 상품의 마케팅 담당자이거나, 명품 마케팅 담당자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에게 이 책은 기대 이상의 지식을 알려줄 지도 모르겠다. 딱딱하고 이론적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Luxury Marketing에 기본적인 틀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

미술 비평의 역사, A. 리샤르

미술 비평의 역사 A. 리샤르(지음), 백기수, 최민(옮김), 열화당 ‘미술 비평의 역사’같은 책을 읽는 이가 몇 명쯤 될까(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수록 이런 시니컬한 반응부터 먼저 보이게 되는 것은 정직한 미술사 연구자의 수만큼이나 미술사, 또는 미술 비평의 학술적 영역과 대중적 영역과의 괴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매우 좋은 책이다. 짧고 간결하게, 그러나 풍부한 인용들을 통해 미술사에 있었던 여러 비평적 태도에 대해 그 장점과 한계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상학적 미술사 연구가 주된 경향으로 자리 잡은 이 때, 리샤르는 (직접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비평을 위한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은 미학, 또는 미술 비평에 있어서 거의 권력..

역사란 무엇인가, E.H.카

역사란 무엇인가 E.H.카(지음), 김택현(옮김), 까치 다 읽고 생각해보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보다 ‘역사학이란 무엇인가’가 더 적당한 제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학자들에게 시선이 고정된 이 책은 학문으로서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 블로크가 그의 시선을 ‘인간’에게 고정했던 것과는 다소 관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위상이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비관주의자들에게는 Carr가 너무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종종 겁을 내는 듯이 비추어지거나 억지로 낙관주의적 관점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논리적인 완결성, 또는 철저한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인류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역사는 이어질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