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898

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지음), 박문재(옮김), 현대지성 사람들로부터 받는 해악을 미움, 시기, 경멸에 따라 생기는데, 현자는 이성적으로 극복한다. (99쪽) 고전 그리스가 끝나고 혼란스러운 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시작된다. 알렉산더는 지금의 인도까지 내려갔다. 이 정복 활동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하였고 서로 다른 문화들이 섞였다. 안정되고 예측가능했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마을의 일상은 새로운 사람들과 문물들로 채워지고 내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으며 세계는 나와는 거리를 두며 서로 긴장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헬레니즘 시대 전반을 채우는 이러한 분위기를 예술의 역사에서는 고전주의 뒤에 이어지는 낭만주의적 시대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철학까지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이 점..

이상한 날씨, 올리비아 랭

이상한 날씨 (Funny Weather - Art in an Emergency) 올리비아 랭Olivia Laing(지음), 이동교(옮김), 어크로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만든다. 이미지로 하여금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가고, 더는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한다. (205쪽)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즉흥적으로 도달한 비상구, 한때 사람이 살았던 섬뜩한 공간을 오가는 일이다. (209쪽) 오랜만에 예술 관련 책을 읽었다. 좋았다. 그건 예술 관련 책이라서기보다는 올리비아 랭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의 글은 상당히 좋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있고 예술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녀는 예술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안다. 그래서 글은 깊이 있으면서도 따뜻한 진지함..

죽음의 병, 마르그리트 뒤라스

죽음의 병 La Maladie de la Mort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지음), 조재룡(옮김), 난다 당신이 말한다: 사랑하기 (7쪽) 당신은 여자에게 낱말들을 반복해보라고 부탁한다. 여자는 그렇게 한다, 낱말들을 반복한다: 죽음의 병 (27쪽)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죽음의 병에 걸려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병 앞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오늘 밤에서 내일 밤으로 그 병을 유예시키고 있다. 이 짧고 강렬한 소설은 예상 밖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며 무수한 생각과 질문을 던진다. 만남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서로의 몸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만나고 헤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날 밤까지 당신은 두 눈에 보는 것에, 두 손이 만지는 것..

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 데이비드 섬프터

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 데이비드 섬프터 David Sumpter(지음), 전대호(옮김), 해나무 우리는 언제나 지독한 편견과 싸운다(안타깝게도 싸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강요하는 편견, 인류 문명이 강요하는 편견, 우리의 생물학적 특성이 강요하는 편견, 우리의 부모나 일가친척, 선생들과 친구들이 강요하는 편견, 그리고 그 편견들 속에서 자라난 우리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자신만의 편견. 그렇다면 편견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정상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고치려고 할 것이다. (아! 한국사회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편견을 고집하고 있는지!) 이 책은 페이스북이나 구글의 서비스,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러한 서비스나 AI를..

관측, 이영주

관측 이영주 지구의 중력이 인간의 피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피는 심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빛이 폭발하면 별을 볼 수 있다.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곳에 잔뜩 힘주고 서 있는 것이 어둠으로 가는 길이었나. 렌즈 안으로 푸른 숲이 번진다. 수은이 빛나는 의자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랑 상관없이 노래를 불러도 되지?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헤어지는 노래를 사랑을 담아 부른다. 뜨끈하고 이상하고 끈끈해. 새벽에 걸어 들어온 수목림 내가 걷는 숲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피가 물들어 있다. 망원경에 입김이 피어오른다. 물큰하게 젖은 잎들이 흔들린다. 자꾸만 이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지구에서 흐르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너의 혈액 때문이었나. 붉게 물든 발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인가. 크..

안녕, 다니카와 슌타로

안녕 다니카와 슌타로 나의 간장(肝臟)이여 잘 있거라 신장과 췌장하고도 이별이다 나는 이제 죽을 참인데 곁에 아무도 없으니 너희들에게 인사한다 오래도록 나를 위해 일해주었지만 이제 너희들은 자유다 어디로든 떠나는 게 좋다 너희들과 헤어져서 나도 몸이 가뿐해진다 혼만 남은 본래의 모습 심장이여 때때로 콕콕 찔렀구나 뇌수여 허튼 생각을 하게 했구나 눈 귀 입에도 고추에게도 고생을 시켰다 모두 모두 언짢게 생각하지 말기를 너희들이 있어 내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너희들이 없는 미래는 밝다 이제 나는 나에게 미련이 없으니까 망설이지 말고 나를 잊고 진흙에 녹아들자 하늘로 사라지자 언어가 없는 것들의 동료가 되자 에 실려있던 시 한 편을 옮긴다. 이제 노인이 된 시인이, "아무래도 젊은 시절에는 쓸 수 없는..

시를 쓴다는 것, 다니카와 슌타로

시를 쓴다는 것 다니카와 슌타로(지음), 조영렬(옮김), 고유서가 아주 오래 전에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집을 읽었다.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 번째 시집에서 우주와 나를 노래하는 시를 읽으며, 이 정도가 되려면 타고 나야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집을 읽으며 다니카와 슌타로가 시인이 된 건 우연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인이 아닌 그를 상상하기 어렵기도 하다. 짧은 인터뷰집이지만, 유쾌하고 시와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때 내 꿈도 시인이었으니. 서가 어딘가에 습작하던 시절의 시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오래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살게 되리라고 젊은 시절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저도 뭔가를 쓰려고 할 때는 가능한 한 제 자신을 텅 비우려고 합니다. 텅 비우..

공간의 종류들,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Especes d'espaces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지음), 김호영(옮김), 문학동네 공간에 대한 산문집이다. 소설인가 싶기도 했다. 페렉의 스타일이 있다 보니. 하지만 이 책이 소설이든 에세이든 상관없다. 충분히 즐길 만하니까. 공간은 이렇게 오직 단어들, 흰 종이에 적힌 기호들과 함께 시작된다. 공간을 묘사하기: 공간을 명명하기, 공간을 글로써 그리기, 해도 제작자처럼 해안을 항구의 이름들로, 곶의 이름들로, 작은 만의 이름들로 채워넣어, 마침내 육지와 바다가 오로지 연속되는 하나의 텍스트 띠로만 분리되게 만들기, 알레프, 전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이 보르헤스의 장소는 바로 알파벳이지 않을까? (27쪽) 페렉은 공간들의 종류를 나열하고 그 공간들 하나하나 설명하며 자신의..

수전 손택: 영혼과 매혹, 다니엘 슈라이버

수전 손택: 영혼과 매혹 다니엘 슈라이버(지음), 한재호(옮김), 글항아리 작가의 삶이란 “가장 특권적인 삶 (…) 끝없는 호기심과 활력, 무한한 열정으로 가득한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여행가가 된다는 것과 작가가 된다는 게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48쪽) “손택은 마리아 칼라스와 같은 방식으로 공격성을 표출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둬야 했죠. 손택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테리 캐슬도 손택이 언제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난과 공격을 퍼붓고 무례하고 까칠하게 굴 준비가 돼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379쪽) 단번에 시선을 잡아끄는 이 책은 매력적인 책 크기와 수전 손택의 사진이 책 ..

아무도 아닌, 황정은

아무도 아닌 황정은, 문학동네, 2016년 읽으면서 참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 세상은 소설가 황정은이 그리는 세상보다 더 끔찍하지 않은가. 언젠가 김서령의 소설집을 이야기하면서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다 죽는다며 불평을 했다. 황정은의 이 소설집이 그런 식은 아니지만, 김서령의 소설들보다 더 끔찍하고 어둡다는 기분이 드는 건 황정은 특유의 문장 때문이리라(아니면 저 변하지 않는 세상 때문일지도). 무미건조하고 애정이 없는 문체(문장), 툭툭 던지듯이 서술되지만, 그 밑으로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숨어 흘러간다. 그러나 그 간절함은 오래된 지하수처럼 무겁고 차가우며 얼음장 같은 냉기와 함께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그 안타까운 간절함마저 이야기 속에서 얼어 독자의 발 앞에 떨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