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896

얼굴 없는 인간, 조르조 아감벤

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지음), 박문정(옮김), 효형출판 배가 침몰 중인데, 우리는 배에 실린 화물을 걱정하고 있다. - 히에로니무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마스크를 둘러싼 논쟁이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었다. 한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는 마스크를 잘 쓰고 다녔지만, 서구인들은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며, 각자 생각하는 것도 다를 듯 싶지만, 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모자도 잘 쓰지 않고 마스크도 잘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스크를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스크를 둘러싼 논의는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아감벤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으며 깊이 생각해볼 문제..

타인을 기록하는 마음, 이수정

타인을 기록하는 마음 이수정(지음), 메디치 이런 책들이 늘어나야 된다. 어제처럼 외부로, 세계로, 선진국으로 시선을 돌려 남의 것들을 수입하고 배우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우리 내부로 눈을 돌려 관찰하고 보듬으며, 보다 행복한 미래를 모색해야 되는 시절이 왔다. 그래서 이 책은 참 소중하다. 스스로 발품을 팔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슬람사원, 모스크를 찾아 그 곳 사람들을 만나 기록하며, 진솔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 바로 이다. 솔직히 기시 마사히코같은 사회학자가 써야 할 책이다. 기시 마사히코를 적기 전에 한국의 사회학자들을 더듬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없었다. 저자인 이수정은 아랍어 전공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아랍, 혹은 이슬람에 대한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모스크를 돌아다니며 이 책을 쓴 ..

헤르만 지몬 Hermann Simon

헤르만 지몬 Hermann Simon 헤르만 지몬(지음), 김하락(옮김), 쌤앤파커스 , 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의 자서전이다.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기업 경영이나 경영학 같은 소재/주제에 딱히 관심 없는 독자에게도 추천할 만한 책이었다. 다양한 주제, 소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내 어린 시절 풍경까지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 고향 출신의 어느 교수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오늘날 견지에서 보면 흡사 중세처럼 느껴지는 삶의 세계에 속했다. 기껏 50년 전만 해도 실제로 그랬다. 그러다가 하룻밤 사이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라고 썼다. (37쪽)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어떻게 경영학자가 되었는..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지음), 송태욱(옮김), 뮤진트리 어쩌다 보니 언제나 옆에 두고 읽는 작가들은 정해져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렇다. 십수년 전 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 지금도 오에의 소설이나 수필집을 읽는다. 일본의 사소설적 경향을 바탕으로 하되, 일본의 민담이나 전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면서 나아가 세계적인 소재나 주제까지도 이야기하며 소설을 쓰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일본 내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상당히 정치적이다. 실은 오에 겐자부로가 왜 정치적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정부 인사처럼 보일 듯 싶다. 가끔 일본 지식인 사회가 일본 정치나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건..

태평양을 막는 제방,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마르그리트 뒤라스(지음), 윤진(옮김), 민음사 이십 대 때 자주 읽었던 소설가들, 파드릭 모디아노, 마르그리트 뒤라스, 르 클레지오, ... 압도적으로 프랑스 문학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많이 읽었던 건 아니고 한 권만 읽어도 그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허우적 되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냉정을 유지해야 하지만, 독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때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읽지 않은 작품들이 더 많고, 읽었던 소설마저 이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읽었던 소설까지 다시 읽어야할 시기인가. 이 소설이 프랑스 문단에 준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프랑스(제국)의 식민지에 건너간 프랑스인 가족의 밑바닥 삶을 적나라하게 보..

아카이브 취향,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Le Goût de l'archive 아를레트 파르주(지음), 김정아(옮김), 문학과지성사 그 순간의 삶을 설명하는 몇 마디의 말과 그 순간의 삶을 단 번에 우리 앞에 끌어내는 폭력 사이에 간신히 낀 채로 존재하는 삶들이다. (36쪽) 작년 마지막 몇 달간 읽은 책이다. 짧고 단단하다. 역사가가 어떤 이들인지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다. 역사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자기 이야기가 왜 진실한 지 그 이유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이다. 그러니 역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착각은 역사가 궁극적으로 진실을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착각이다. 역사는 세부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실 담론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 어법, 정격(학문적으로 엄정한 형..

일본산고, 박경리

일본산고日本散考 박경리(지음), 마로니에북스 어수선하다.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만 한국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촛불을 들고 탄핵을 지지했다고 해서 근본이 바뀌진 않는다), 또한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져 온 진보와 퇴보의 순환 속에서 지금은 퇴보의 순간이며, 그것을 막기 위해 정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그랬다. 바진의 에 아우슈비츠가 날조된 거짓이라고 믿는 서독 청년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 한국이 똑같은 꼴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때문일 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의 난무는 진짜 정보(진실)마저 사라지게 하며 가짜 뉴스를 믿는 사..

나, 프랜 리보위츠, 번역 유감

나, 프랜 리보위츠 프랜 리보위츠(지음), 우아름(옮김), 문학동네 (살짝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으나, 어딘가 이상하게 읽히지 않았다. 번역이 이상했다. 번역된 글을 미루어보건대 상당히 시니컬하고 자신의 주장은 단정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유머러스할 것이라 여겨졌다. 그리고 읽어나갈수록 번역이 원문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리의 숨바꼭질'이라는 제목에 대한 의심이 그 시작이었다. 리보위츠스럽지 않은 소제목이랄까. 그래서 그냥 목차부터 찾아보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조금 의견을 적었다. 벌써 삼분의일 정도 읽었는데, ... 그리고 이 번역서로 리보위츠를 오해하지 말기를.) 읽히지 않았어. 읽히지 않는다를 넘어, 이렇게 재미없진 않았을 텐데. 이렇게 재미없어서야 베스트셀러가 되..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피터 자이한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Disunited Nations 피터 자이한 Peter Zeihan (지음), 홍지수(옮김), 김앤김북스 돌이켜보건대, 젊은 시절 나는 확실히 세상살이를 좀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비관적으로 해석하여 포기의 마음이 한 켠에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후자에 가까워 보이긴 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사정이 딱히 달라진 건 아니라서 지금도 가끔 모든 걸 내려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피터 자이한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너무 한 쪽 분야의 책들만 읽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나름 서양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고 철학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자이한이 가지는 동시대에 대한 정보는 남다른 데가 있..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지음), 최덕수(옮김), 열린책들 은 전설이 되었다. (149쪽) 정조 이후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지 못한 듯 싶다. 이후는 세도정치 시기였는데, 이 부분을 이야기해봤자 가슴 아픈 이야기 밖에 나오지 않으니(그야말로 조선 왕조가 가장 무능했던 시기, 어쩌면 임진왜란 시기보다 더 심했을 지도), 그냥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수십 년 전 버전이니, 지금 역사 교과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끔 한국도 일본처럼 서구 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상황은 동일했을 듯 싶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경우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 즉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정치문화였다. (16쪽) 조선의 성과이면서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