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897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한유주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한유주(지음), 워크룸프레스 언제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아직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눈이 내리고 있다. 재형은 집에 들어가기 전 - 몸을 흔들어 눈을 털어내고, 춥다고 생각할 것이고, 느낄 것이고, 심연을 자유자재로 건너뛰는 고양이들의 식사를 챙겨줄 더 좋은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눈이 내리기 때문인지, 혹은 용감하게 페이지를 벗어나고, 또 다시 들어오는 존재들 때문인지, 경비원은, 혹은 경비워들은, 가스 점검원은, 택배기사는, 행인들은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안다. 3층의 그는 불투명을 되찾은 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쓸어내린다.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해, 지킬 수 없더라도 지켜야 한다. (79쪽) 이 짧은 소설은 스틸 사진, 혹은 ..

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

천 개의 아침 메리 올리버(지음), 민승남(옮김), 마음산책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는다.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원문이 더 좋다. 시어는 확실히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정확하게 옮겨지지 않는다. 하나의 단어가 가지는 세계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익혀야 된다. 그 언어 속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 올리버는 확실히 생태주의적이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 아름다운 장소들로의 여행에 대하여 나는 아직도 날마다 신을 찾아다니고 아직도 도처에서 신을 발견하지, 먼지 속에서, 꽃밭에서, 물론 바다에서, 저 멀리 누워있는 섬에서, 얼음의 대륙들, 모래의 나라들, 모두가 저마다의 청조물들과 신을 갖고 있지, 어떤 이름으로든 주머니에 아직 백 년쯤 넣고서 배..

처음 읽는 터키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처음 읽는 터키사 전국역사교사모임(지음), 휴머니스트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 군사력이므로, 러시아가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한 때 같은 나라였으므로 정치적, 외교적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짧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최근 세계사나 지리, 혹은 지정학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유튜브로 볼 수 있는 삼프로TV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투자방송이나 투자 의사 결정을 위해서는 인문학적 배경이 강조하며 이와 관련된 방송들을 편성해 해주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추천한다!) 삼십 대 후반 약 이 주 정도 이스탄불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 도시는 중세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한 쪽으로는 상당히 낙후되..

예정된 전쟁, 그레이엄 앨리슨

예정된 전쟁 Destined for War - Can America and China Escape Thucydides's Trap?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지음), 정혜윤(옮김), 세종, 2018년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 - 투키디데스 인간사를 다루는 철학자, 법학자, 사회과학자들을 내내 괴롭혀온 주범은 바로 그 원인의 복잡성이다. (15쪽) 이 복잡성으로 인해 우리는 문제를 최대한 단순화시켜서 이를 분석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알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 우연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몰락하고 말 것이다. 인류는 예측..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지음), 류재화(옮김), 밤의책 프루스트에 관한 이 에세이는 1940~1941년 겨울 그랴조베츠 포로수용소에서, 우리가 식당으로 쓰던 어느 수도원의 차가운 방에서 구술된 것이다. (9쪽) 프루스트를 읽다만 사람에게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동경이자, 길 떠나기 전의 휴식이다. 이 달콤한 휴식으로 나는 먼 길의 여정에 쉽게 오를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는 너무 긴 분량 탓에 손을 대지 못했고, 손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것같아 주저거렸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불과 십여년 전부터이지, 그 전, 지금보다 한창 젊을 때는, 제대로 된 번역서도 없었고 그 번역서를 막상 꺼내 읽어보면 재미도 없었다. 실은 번역이 제대로..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지음), 을유문화사 십수년전 나는 어느 통신기업의 사보를 만들고 있었다. 월간지라 매달 기업 경영이나 기술과 관련된 주제를 찾아 편집 방향을 정하고 관련된 전문가나 기고자들을 찾아 섭외하고 원고를 청탁하고 진행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일부는 내가 직접 쓰기도 하고 마감일에 온 원고를 다듬기도 하고 수정 요청을 하기도 했다. 수정했으나, 제대로 글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많이 뜯어고치기도 했다. 그 때 제대로 한국에 제대로 된 작가들이 많지 않음을 알았다. 특히 특정 분야에 제대로 된 통찰과 글쓰기 능력을 갖춘 이들이 없다는 것을. 당시 출판사에 근무하던 지인은 유명한 소설가들 중에도 그런 이가 있다며, 편집자들의 노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 참 많은 ..

나의 사유 재산, 메리 루플

나의 사유 재산 My Private Property 메리 루플Mary Ruefle(지음), 박현주(옮김), 카라칼 그래서 경찰들이 내게 달리 할 말이 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였다.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 (15쪽) 결국 나(자아)를 알거나 너(타자, 외부, 세계)를 알게 될 뿐, 나와 너를 동시에 알고 받아들이진 못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도서관 2층 카페 의자에 앉아 살짝 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찰들이 모두 젊어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더 들었다면 만족하지 못했을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지음), 송태욱(옮김), 자음과모음 재미있게 읽었다. 의외로 금방 읽을 수 있다. 일본 학자의 책들은 의외로 쉽고 명쾌하게 읽힌다. 가라타니 고진도 마찬가지이고 사사키 아타루도 그렇다. 이와 반대로 한국 학자들의 책은 상당히 어렵고 난해하며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나조차 어렵다. 실은 쉽게 씌여진 책은 너무 뻔한 이야기만 적고 있어 시간이 아깝고 깊이를 가진 듯한 책은 이 학자는 자신도 알고 쓴 것일까, 그 스스로도 이 단어나 이 개념을 제대로 알고 쓴 것일까 되묻게 된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한국 학자가 쓴 책에는 손을 대지 않고 번역서에만 손이 갔다. 다만 이건 내가 한창 공부할 때이니, 지금 나오는 책은 어떤지 잘 모른다. 최근 읽은..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지음), 이승수(옮김), 마음산책 극히 일부의 작가들만 여러 개의 언어로 글을 썼다. 또한 어떤 작가들은 모국어 대신 다른 언어로 글을 썼다. 사무엘 베케트는 영어와 불어로 글을 썼다. 대표작인 는 불어로 먼저 썼고 후에 스스로 영어로 번역했다. 조지프 콘래드는 모국어인 폴란드어 대신 영어로 글을 썼으며, 러시아 태생의 나보코프도 영어로 글을 썼다. 나보코프는 어렸을 때부터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의 영어 문장은 압도적이다. 루마니아 태생의 에밀 시오랑은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로 글을 쓰다가 아예 파리에 정착해 불어로만 글을 썼다. 그의 불어 문장은 20세기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줌파 라히리도 모국어는 뱅골어지만, 어렸..

밤엔 더 용감하지, 앤 섹스턴

밤엔 더 용감하지 Braver at night 앤 섹스턴Anne Sexton(지음), 정은귀(옮김), 민음사 앤 섹스턴 시집을 읽었다.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스스로 버티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미워하지만 사랑했고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기 내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1960년대 미국 여류 시인이 무엇과 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할까. 더블 이미지 Double Image (...) 너를 기쁨이라 부를 수 있도록 우리가 너를 조이스라 이름 지은 걸 나는 기억해 강보에 푹 싸인 채 축축하고 이상하게, 너는 내 무거운 가슴에 어색한 손님처럼 왔어. 나는 네가 필요했어. 나는 남자애를 원하지 않았어. 여자아이만을, 이미 사랑받고 있는, ..